한국 위인 이야기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 업적 알아보자.

IT 특임대 2022. 9. 2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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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 임진왜란 업적 알아보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 최초로 의병(義兵)을 일으킨 사람이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이다. 일본군의 침입으로 조선왕이 의주로 피난을 하자 그는 경상남도 의령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켰던 백성들의 활약은 매우 컸으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의 업적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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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 생애 및 시대적 배경 알아보자.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은 1585년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조선임금은 곽재우가 제출한 답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의 합격을 취소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매우 실망하여 다시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낙동강 근처에 망우정이라는 집을 짓고 소박한 삶을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사람들을 모아 의병(義兵)을 조직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나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방 세력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나라의 중심이 되던 시기였다. 조선시대의 근본이었던 성리학의 견해 차이로 인해 당파 싸움이 있었던 시기였다. 이율곡과 같은 신하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여 10만 군대를 양성하여 다른 나라의 침입을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파 싸움을 하고 있던 조정 신하들로 인해 이런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 임진왜란 활동 알아보자.

과거시험에서 떨어진 후 망우정에서 3년을 보낸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하였다. 부산포를 통해 조선땅에 침입한 일본은 궁궐이 있는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곽재우 장군이 살고 있던 의령을 지나야 했다. 의병(義兵) 모집 초기에는 스스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다. 곽재우가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의 가족까지 보살피자 의병(義兵)에 참가하는 수가 점점 늘어났다.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은 의병(義兵)의 수가 늘어나자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 조직을 갖추고 체계를 정비하였다. 그는 일본군의 공격을 수비하는 전투를 하기보다 기습적으로 적을 공격하여 혼란에 빠뜨리는 전략을 선택했다. 곽재우는 1592년 5월 경상남도 함안에서 일본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곽재우의 활약으로 인해 일본군이 호남지방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 홍의장군(Honguijanggun) 된 이유 알아보자.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은 일본군과 싸울 때 전면적이 아닌 기습 공격을 택했다. 정규 군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군에 맞서 싸워서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싸움을 할 때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채 전투를 지휘하였다. 백성들은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고 홍의장군(Honguijanggun)이라고 불렀다. 일본군은 붉은 옷을 입은 곽재우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했다.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 남긴 업적 알아보자.

조선시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장수들은 적의 머리수를 확인해서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위인 곽재우 장군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적의 머리를 베면 모두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가 전쟁에 참가한 것이 자신의 출세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정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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