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위인 이야기

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 누구인가.

IT 특임대 2022. 9. 2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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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 누구인지 알아보자.

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시대의 이순신과 함께 명장으로 칭송받는 사람이다. 그는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성을 쌓고 인재를 발탁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관직은 고려군의 총사령관과 문하시중(munhasijung)의 벼슬에 올랐다. 거란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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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 어린시절 살펴보자.

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은 금주에서 태어났다. 금주는 지금의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일대를 말하며,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강감찬의 조상은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강궁진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였다.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키가 작고 얼굴에 곰보 자국까지 있었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36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시험에 장원급제를 하고 벼슬을 얻게 되었다.

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 활약 알아보자.

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이 관직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 고려는 거란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거란의 1차 침입 당시는 서희가 거란과의 회담을 벌여 큰 전쟁 없이 압록강 일대의 강동6주를 획득했다. 고려가 획득한 강동6주는 거란에게도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거란은 1차 침입 때 강동6주를 내준 것을 후회하고 고려의 내부 사정을 빌미로 2차 침입을 했다.

 

고려는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었고, 고려 임금 현종은 신하들과 함께 나주로 피난을 떠났다. 거란이 요구했던 조건은 고려 왕이 거란의 왕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로서 예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 임금 현종은 거란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맹세를 했다. 거란은 현종의 다짐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현종은 거란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고려의 장수 양규는 돌아가는 거란을 기습하여 전쟁을 승리로 만들었다.

 

 

 

 

귀주대첩 승리한 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 배워보자.

고려 현종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거란은 이를 빌미로 다시 고려에 침입했다. 거란군 장수 소배압은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왔고, 고려에서는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이 일흔의 나이에 1만 2천 명의 군사로 거란군과 싸웠다. 강감찬 장군의 전략은 거란군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 보다 기습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은 흐르는 강을 막았다가 다시 한꺼번에 흐르게 해서 거란군을 전멸시킬 계획을 짰다. 고려 군사들이 소가죽을 이용하여 물을 막고 거란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거란군이 강물을 건너는 틈을 이용하여 막았던 물을 흐르게 하여 거란군을 섬멸하였다. 거란군은 갑자기 늘어난 물로 인해 대부분 죽었으며 살아남은 자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고려가 거란에게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거란은 다시 고려를 침범하지 못했다.

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 생애 알아보자.

고려시대 한국 위인 강감찬 장군은 평소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부정하게 자신의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에는 누구보다 먼저 나서 문제를 해결하였다. 다른 관리들과 달리 그는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소박한 생활을 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으며, 벼슬을 그만둔 후에는 자연을 벗 삼으며 살다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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