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위인 이야기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 및 일대기 배워보자.

IT 특임대 2022. 9. 1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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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 승리 요인 알아보자.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는 우리나라 무장투쟁 역사에서 가장 큰 승리를 한 전투이다. 독립군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대규모 적을 상대하기 위해 지리적 이점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게릴라식 전투 방법을 선택했으며, 군대 조직을 세분화하여 작은 군대 조직으로 운영을 함으로써 비밀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승리 요인과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자.

김좌진 장군 독립군 총사령관 되다.

김좌진 장군은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갔으며, 1919년에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했다. 그는 이곳에서 군사를 양성하고 애국 정신을 교육하는 일을 담당했다.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독립운동 단체인 북로군정서(Bukrogunjeongseo) 총사령관에 올랐다. 김좌진 장군은 만주에 있는 독립군들을 모집하여 하나의 부대로 만들었고, 다른 나라에서 무기를 사들여 독립군의 세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특히 독립군 부대안에 군사학교를 세우고 독립군들이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군사학교를 통해 독립군의 체계가 확립되었고 정식 군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 배경 알아보자.

1919년 3.1운동 이후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만주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었다. 일본은 대한민국 독립군들을 찾아내기 위해 만주로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독립군들은 소규모 단위로 구성되었고, 일본 순찰소 등 일본군 주요 시설을 공격하였다. 일본은 독립군 추격에 계속 실패하자 일반 평민을 체포하고 괴롭혔다. 당시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있던 홍범도 장군이 일본군을 독립군 본거지였던 봉오동(Bong_odong) 계곡으로 유인하여 섬멸하는 큰 승리를 얻었다.

 

'봉오동(Bong_odong) 전투이후 일본은 간도 지방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많은 군대를 투입했다.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일본군과 청산리에서 만났다. 김좌진 장군 부대는 일본군을 청산리의 골짜기로 유인하고 기습 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을 섬멸하게 된다. 이로써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김좌진 장군 노비 문서 불태우다.

김좌진 장군 집안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살았으며 소문난 부자였다.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땅도 많았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릴때부터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는 글공부보다 활쏘기, 말타기 등을 즐겨했으며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약자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생활을 했으며, 나라에 대한 애국 정신이 강했다.

 

김좌진 장군은 계몽 지식인이었던 김석범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람은 그 자체로 존중을 받아야 하며 신분의 격차가 없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집안의 모든 노비들을 불러서 큰 잔치를 벌였고, 그 자리에서 모든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또한 자신이 가진 재물을 나눠주고 논밭을 무상으로 주며 그들의 살길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 모든 사람이 신분의 차이 없이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실천하게 된 것이다.

김좌진 장군 교육 계몽운동 펼치다.

김좌진 장군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노비에게 나누어 준 후 백성들의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교육이야말로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집을 학교 건물로 내놓고 호명학교를 세웠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교육을 시작했다. 특히 학생들에게 애국정신과 민족정신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이후에도 그는 서울로 올라와 신교육 운동을 펼치고 계몽단체에 가입하여 교육을 통해 나라를 되찾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 운동이 훗날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는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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