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위인 이야기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 누구인가.

IT 특임대 2022. 9. 1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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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 누구인지 알아보자.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은 퇴계이황과 함께 조선시대 성리학을 발전시킨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고자 했으며, 조선의 발전을 위해 국왕에게 직언을 하는 진정한 신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조선 임금의 신임을 얻었으며,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 유년시절 알아보자.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은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잘 알려진 문인이자 예술가인 신사임당이다. 이율곡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다. 이율곡은 3세 때에 이미 글을 읽었으며, 4세 때에 중국 역사책을 배우기 시작했다. 13세에 과거시험을 치뤘으며, 1등을 차지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일반인은 한번도 합격하기도 힘든 과거시험에서 9번이나 수석을 차지하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 사회업적 배워보자.

조선시대는 양반이 주도하던 사회로 실력보다는 가문이나 출신을 중요시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환경이 조선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은 9개의 개혁안을 발표했다. 주된 내용은 출신 성분보다는 능력위주로 사람을 기용해야 하며, 신분을 가리지 말고 평민을 포함하여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은 나라의 근간인 조세제도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주장하였다. 지방에서 나라에 전달되는 물품이 관리들에 의해 빼돌리지 못하도록 물품 관리대장 사용을 꾸준히 주장하였으며, 나라의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군대 조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십만 양병설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주장이었지만 다른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는 못했다.

 

실천방법 중시한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 배워보자.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발전한 시기다. 퇴계이황의 성리학은 체험을 중시한 것이었지만, 이율곡의 성리학은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참된 학문으로 규정하였다. 아무리 좋은 이론과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이는 진정한 학문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백성들이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각 지방에 서원, 향교, 서당의 건립을 장려하고 보급하는데 노력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은 훌륭한 학자인 동시에 많은 제자를 양성한 교육자였다. 교육을 통해 국민들의 교화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며 그가 쓴 책에 이러한 노력들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고 강조했으며, 지식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 퇴계이황 관계 알아보자.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은 당시 학자였던 퇴계이황을 존경하고 그의 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율곡은 23세 되던 해에 퇴계이황을 찾아가 그의 집에 머물면서 학문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시를 짓고, 관심주제에 대해 토론했다. 퇴계이황은 이율곡의 재능에 크게 감탄을 하였다. 이때 퇴계이황의 나이는 58세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35살 차이가 났지만 그 후에도 학문적인 교류는 계속 이어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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